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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베리원

 어스름이 내려앉은 거리를 걷는다. 한 해의 마지막을 굳이 시끄럽게 장식해야 하는 걸까. 인파를 피해 한 구석으로 슬쩍 걸음을 옮겼다. 학교는 오늘에서야 느지막한 방학식을 했다. 방학 잘 보내라며, 당분간은 못 보겠다며 당신은 아쉬움을 띤 미소를 지어보였지. 그에 대답하고픈 말은 한가득이었는데 쉽사리 입을 열지를 못하겠다, 왠지 모르게, 다 지나버린 지금도. 당신만 보면 나의 위장 속에서 별가루가 갓 구워지려는 팝콘처럼 튀어 오른다. 위벽을 긁어내는 느낌에 나는 아프고 메마른 기침을 가끔 토해내기도 했다. 입을 열면 당신에게 그 날카로운 조각들이 튀어나갈 것만 같아서. 어쩌면 미리 그런 상황을 피하려고 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의 별로 당신이 상처를 입는 것이 죽기보다도 더 싫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여튼 당신의 앞에서는 도통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실은 그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침묵을 고수하던 내게 당신은 참 살갑게도 곁에 있어주었다. 그것은 동정심 비스무리한 무언가일까. 당신의 내면 속 어떤 예민한 감수성을 우연히도 혼자 있던 내가 건드려 버린 걸까. 나만한 나이의 말수가 적은 여동생이 있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게 누구든 간에 나는 상관없었고 그저 당신은 가끔 혼자 앉아있는 나를 찾아와 말을 걸곤 그대로 스쳐지나갔다. 우리 사이에서 중요한 일은 그것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나는 그 맴돌던 적막을 잊지 못하고 지금도 괴롭고 외롭게 떠올린다. 나에게는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던 그 시간이 행여나 당신에게 불편하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가 가장 무력해지는 순간일 테다. 나보다 한 해를 꼬박 더 살았음에도 왜소한 체격의 당신은 또래보다 큰 키라고 나름 자부하던 나를 도미노마냥 와르르 무너뜨리고. 그러고선 재미있다는 듯이 천진난만한 웃음만을 남긴 채 시야의 바깥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당신이 웃는 순간마다 나는 비명이라도 지르고픈 심정이었다. 속에서 역한 느낌이 나 고개를 확 숙이고선 끅끅거렸다. 고개를 숙였기에 당신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영문도 모른 채 그 때의 당신은 무슨 이유에선지 숙인 나의 등 뒤로 얼굴을 기대며 안아주었다. 나는 조금 당당했고 그만큼 조금 공허했다.

 

 

 돌이켜보면 당신에게 내가 먼저 다가간 적이 없다. 일방적인 관계는 늘 좋지 않게 끊어질 운명임을 안다. 한번이라도, 결이 좋아보이던 그 머리카락에, 어렴풋이 좋은 향이 나던 그 살결에 닿아봤으면 좋으련만. 그럼 오래도록 나는 닿은 손길을 감싼 채 주저앉고선 심해어와 함께 잠식할 텐데.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깊고 깊은 바닷속을 이유도 모른 채 그리워한다. 우리는 이제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얼마 안 되는 방학이더라도 당신은 당신대로, 나는 나대로 바쁠 테다. 당신이 나를 찾아와주지 않으면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명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에게 짧았고 나에게 가혹했던 긴 시간이 사라져간다. 그것을 나만이 기억하게 될 내일이 무기력하다. 나는, 당신을 무어라 불러야할지 모르겠다. 선배, 우리는 무슨 사이에요? 몇 번이나 당신에게 묻는 나를 상상해보았다. 그랬더니 그렇게 물어보기가 그리도 겁이 났다.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몰랐다, 이를테면, 그래. 더 이상은 안녕을 고하지 않고선 못 배길 시간이다. 다시금 나는 기침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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